캐릭터 스토리

료우의 이야기

깨죽 2025. 4. 18. 11:04

 
그러니까,그날은 비가 왔었다.
누님을 떠나 보낸 날에는 참 많은 비가 쏟아져내렸다.
가엾은 동생의 체면을 위해 누님이 마지막 까지 내려준 비였을지도 모르지.


 

츠키시로(月城),무릇 여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아름답게 태어난 여인은 제 의지와는 상관 없이
사내에게 팔려 나가는게 정해진 수순이란 말이다.
꽃을 돌보듯 사내가 물을 주고 손수 가꿔야만 피어난다,그것이 여인의 삶이다.

료우는 자신의 아버지의 말에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씀 따위,이따위 진부한 이야기 따위—
불현듯 누님의 표정이 떠올랐다. 분명 웃고 있었지,허나 그 미소가 지독하게 불행해 보였다.
그럼에도 늘 하던 것 처럼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 늦은 밤,시즈카의 방에는 밤새도록 희미한 등불이 꺼질 줄을 몰랐다.
망설이던 료우는 그녀의 방 문을 작게 두드렸다.

'누님.'

그 짧은 부름에 놀란듯 시즈카가 방문을 살짝 열어 젖혔다.

'이 시간에 왜 안자고...'

료우는 대답 대신 제 누이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분명 울었구나,눈가가 약간 붉어진 꼴이 한참을 울었던 것이 틀림 없었다.

'마음이 많이 복잡 하신가 봅니다.'

료우의 물음에 그녀의 두 눈이 불안하게 일렁거렸다.그녀의 눈동자는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싶다가,
순식간에 료우를 향해 멈춰섰다.

'난,이런 것들...하고 싶지가 않아.'

그녀가 말한 이런것들이란 무엇일까,팔려가듯 시집을 가는 일?
평생을 아버지의 말에 휘둘리며 사는 것?
원치 않는 인생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것?
료우는 자신의 누이를 바라봤다.이리도 나약한 소리를 하다니,마음이 많이 복잡한 듯 했다.
그는 그리 생각을 했다.

'모두들 제각각의 의무를 지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료우의 간결한 대답에 시즈카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
둘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그 고요한 침묵이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볼을 스쳐 지나가고,시즈카의 방으로 찬 바람이 들어가자
료우는 말 없이 방문을 닫았다.
료우가 손수 닫아준 방문 너머로 시즈카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허나,자신이 무엇을 이야기 하고 위로 한다 한들 그녀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가을이 오면 낙엽이 물들어 가고,겨울이 오면 떨어지듯이...
그것들은 태어나는 순간 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이었다.
언젠가 자신도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종마(種馬)가 될 날이 올테니까.

료우가 걸어가는 등 뒤로 시즈카의 방 불이 꺼졌다.
저 멀리 동이 틀 준비를 하는 듯 하늘이 조금씩 물들어 갔다.
료우는 밝아 올 태양을 잠시 바라보다,이내 고개를 돌렸다.


 
시즈카가 꽃 가마를 타던 날엔 맑았다.
날씨가 너무나도 좋아서,시즈카는 행복 해 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료우는 멀어지는 제 누이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부군이 시즈카를 바라보는 눈 빛엔 애정이나 온기 따위는 없었지만,
으레 혼례라는것이 그런 것들 아닌가.
그는 자신을 바라보던 시즈카의 두 눈을 바라보다,눈을 감아버렸다.
그럼에도 빌었다,제 누이가 퍽 행복하기를 말이다.

료우는 잠시 고개를 젖혔다.하늘에선 빌어먹을 햇살이 그의 두 눈을 괴롭혔다.
언젠가 누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료우—멋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약자를 지키는 것,여인을 함부로 취하지 않는 것,신념을 이고 살아 가는 것.
흔들려도 자세를 고칠 수 있는 것,지켜야 하는것을 지키고 살아 가는 것.
료우는 쓰게 웃었다.미안해 시즈카,나는 단 하나도 지킬 수 없는 놈이야.


 
그날은,먹구름이 몰려오던 날이었다.
'시즈카 아가씨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료우는 검을 뽑아 들었다.놀란 하인의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야.'

료우가 어이없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녀가 꽃 가마를 타고 떠난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는 뽑아버린 검날을 바라보며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자결을 하셨다고,가주님도 서신을 받고 놀라신 것 같았습니다.'
 
료우는 도통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검을 내려다 봤다.
 
'시즈카가 왜...'
 
그는 말 하려던것을 잠시 멈췄다. 왜라니,사실은 알고 있지 않나.
그녀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빌어먹게 불행해 보였다.
그 날,그녀가 입을 다문것은 순응이 아닌 체념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은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었음을 안다.
간절했겠지,내가 무엇도 할 수 없다는걸 알면서도 뭔가를 찾고 있었겠지.
나는 그 날 무엇을 했더라.
 
'아.'
 
료우는 불현듯 떠올렸다.
그게 불편해서 시선을 돌렸구나.
 
'내가,시즈카를...'
 
외면했었구나.
 


 
시즈카를 보내는 날엔 많은 비가 내렸다.
굵은 빗방울이 미친듯이 쏟아져 내렸지만,료우는 우산 조차 쓰지 않고 비를 맞았다.
거짓말이지,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잠시 바라봤다.
이 손으로 배웅을 했던가,잘가라고 내뱉었던가.
 
기이한 기분이었다.분명 살아있던 제 누이가 이 흙바닥 속에 묻혀있다.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그 목소리가 이제는 잊혀져갈 것들이 되어간다.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그 모든것들이 빛 바랜 추억으로 정리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평생,아니,죽는 순간 까지도.
 
빗방울이 료우의 속눈썹에 맺혀 떨어졌다.아무도 모를것이다,이것이 진부한 눈물일지 빗물일지는.
아무도 모를것이다.시즈카의 바람 따위는...
시즈카는 나를 원망 했을까,이미 죽어버린 자의 대답 따윈 영영 알 수가 없겠지.
료우는 고개를 숙였다.어쩌면 이대로 비에 젖어,녹아버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시즈카를 만날 수만 있더라면.
비겁한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말 해야할까,
아니라면 — 시즈카가 행복하길 바라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료우가 가만히 중얼 거리며 검집을 쓸어내렸다.
내 누이는 그것을 믿었을까,내가 지켜주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나는 지키는 것 따위엔 가망이 없는 새끼야.'
그가 작게 실소했다.
'그래도 지켜주고 싶었어.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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